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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이야기- 지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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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람지기
작성일10-01-28 00:00 조회2,1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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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雲


<극락 이야기>



극락세계는 우리들은 흔히 상상력으로나 그려보는 세계로 생각하기 일수다. 신심있는 사람들은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지만 신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래도 거짓말이 아닌가라고 추측해 본다. 그러나 설령 불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드라도 나이가 들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진사람들 말하자면 죽음의 공포때문에 마음의 위안을 삼아보고자 한번쯤은 믿어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정말 극락정토는 있을까? 우리들의 인식의 영역 밖에 있으므로 상상력을 동원할 수 밖에 었을까? 만일 우리들의 인식의 영역을 무한대로 넓힌다면 아마 그렇다면 여기서 공간적으로 십만억불국토를 지나야만이 있다는 그 극락정토라도 이 무한대의 마음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이 역시 상상력이라고 한숨지를 수밖에 없다고 자위해 버릴지 모른다. 아니 극락세계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여겨지면서 에라 포기하자라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겠지. 그렇지만 쉽게 이 문제에 대해서 포기하지말자. 희망을 갖고 탐험을 해 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무엇이든지 자포자기식은 패배주의적 이고 자아학대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폭 좁은 졸장부 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한다면 그 사고의 폭은 넓어지고 호기심과 창의력이 발휘되는 행운이 따를지 어떻게 알까?


자 우리들의 생각 즉 마음의 영역부터 아니 마음의 크기부터 탐구하는 것이 극락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리라고 본다. 외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상상력의 허구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들의 마음의 크기는 얼마일까? 어느정도일까? 어릴때 생각해보자 유치원생 정도의 나이 때에 흔히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너 엄마를 얼만큼 좋아하니라고 누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엄만 두손을 크게 벌리고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이 만큼 하고 말하기도 하고 하늘만큼 또는 땅만큼하고 대답한 기억이 없는가 아니 동생이나 조카녀석에게 이러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재미있지 않니? 귀여운 동생이나 조카의 말에 웃음을 지을 수 있겠지. 그러나 이러한 대답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봄직하지 않을까? 단순히 상상력이라고 돌려버릴 수도 있다. 하늘이나 땅의 크기가 대답한 어린 아이의 마음의 영역 밖에 있다면 이러한 대답이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 레오나드 다빈치는 우포만한 우리들의 눈의 망막에 모든 세계가 다 들어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눈이 있어서 눈이 이러한 세계를 본다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도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아야하지만 죽은 사람은 보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눈이 보지 못한다면 무엇이 볼까? 그것은 마음이 눈이라는 창구를 통하여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우표만한 크기를 가지고도 오히려 전세께를 모두 수용한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클까? 그러나 이렇게 말하여도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고 그것이야 그렇수 있지만 그 큰 세계의 모두를 볼 뿐이지 감각되지는 않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 그러면 우리들이 감각할 수 있는 영역의 범위를 측정해 볼 수 밖에,


그런데 우리들이 탐구하는 극락에 대하여 마음의 크기를 이야기 하는 마당에 이 마음이 세계보다 아니 이 우주보다 더 크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단지 상상력을 가지고 추측하는 것은 아마 우리에게 어떤 단점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자문해 봄직한데 어떨까? 우선 이문제부터 잠깐 집고 넘어가자. 우리들은 마음의 영역이란 우리들이 의지하고 있는 이 몸이라는 틀 속에 정확히는 우리들의 몸 속에 있다라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집착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진리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은 동지 섣달 무우자르듯이 잘라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들이 탐구하는 정신세계를 퇘색화할 시킬 우려가 다분히 있다. 일단 이러한 고정관념부터 파괴해야만이 우리들의 사고영역이 훨신 넓어질 것이다. 자 그려면 실험을 해보자. 어는 맹아학교 선생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학생들도 수학여행을 대단히 좋아한다면 이해가 갈까? 눈으로 보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수학여행이 가능하겠는가라고 반문하겠지. 참으로 불가사의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꼭 눈으로만 사물을 본다는 것은 우리들의 무지이고 고집이며 고정관념임을 확연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을 經典에는 근(根)이라는 표현을 쓴다. 근이라는 것는 뿌리를 의미한다. 나무 뿌리는 땅 속의 물을 빨아들이고 영양분을 섭취하는 역활을 한다. 또 일정양의 물을 머금기도하고 머금고 있는 물을 다시 토해내기도하는 것이 뿌리의 기능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몸도 바로 나무의 뿌리와 같은 작용을 가지고 있다. 뿌리로서 작용하는 우리 몸의 기능은 보통 다섯개가 있다. 말하자면 눈 귀 코 혀 몸의 피부가 그것이다. 이 다섯개의 뿌리는 대상을 파악하는 즉 대상을 빨아들이는 기능 멈금기도 하고 토해 내기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몸의 기능중에 대상에 대하여 눈 귀 코 혀 몸의 피부 등의 感覺器官이라는 창구를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이 작용할 때는 눈은 視覺, 귀는 聽覺, 코는 嗅覺, 혀는 味覺, 몸의 피부는 觸覺 등의 감각이라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말하자면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이 대상을 본다라고 인식하거나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안목이 좁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눈으로만이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닌 다른 감각기관을 통하여서도, 귀로도 소리를 볼 수 있는 것이고 촉감으로도 촉감의 대상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모든 감각은 개별적으로 그 본다는 내용의 형태나 색깔이 다르기도 하지만 총체적으로 모든 감각이 본다는 그 보는 힘은 같은 것이 라고 한다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장님학생도 수학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사실적인 예를 들어보자. 가을에 감나무에 매달려 있는 감을 따기 위하여 긴 장대를 가지고 높이 매달려 있는 감을 딸 때에 장대 끝에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만일 감각을 느낄 수 없다면 그 감을 딸 수 없다. 왜냐하면 무감각하면 마치 다리에 쥐가나서 감각이 상실될 때 일어서고 싶은 생각이 나더라도 일어설 수 없을 뿐더러 겨우 부촉을 받아서 이러섰다고 하더라도 한 발짝욱도 옴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말하자면 장대 끝에 감과 접촉되어 느끼는 감각이 없다면 그 감을 딸 수 없다는 것이다. 한번 실험해 보면 금방 확인 할 수 있다. 또 운전수는 운전 중에 트럭의 바뀌에 끼인 작은 돌을 감지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걸프전쟁 때의 이야기로 이라크 상공에서 8000파운드(약 3.6톤)에 달하는 무거운 폭탄의 무게 때문에 동작이 느린 영국공군의 토네이도기가 이라크의 대공포화를 피하기 휘하여 1500피트(457m)의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터려 사막에 털석 하고 떨어지는, 사막과 폭탄과의 접촉의 감각을 느낀다고 공군조종사는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는 처음부터 육체라는 틀을 벗어나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까막케 모르고 있을 뿐, 아니 우리들의 마음은 육체라는 특 속에서만이 작용한다고 너무나 총명하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이라는 틀 자체가 바로 마음이 작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매개체라고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매개체 자체가 사라지고 없으면 과연 우리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의 범위를 가지고 활동할까? 이것은 상상이 아니다. 수행의 경지가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면 자연히 나타나는 경지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나 현상이 나타날 때, 말하자면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실 또는 철학 과학 경제 등등의 현상을 판단할 때, 현재 이러나고 있는 현상 하나를 보고도 과거의 있었던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여러가지 현상까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이러한 사람은 마음의 쓰임세가 보통 사람보다 스케일이 크다고 보면 틀림 없을 것이다. 오랬동안 긴 여행을 해본적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참으로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여행을 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시야가 넓어지고 마음이 차분해 짐을 느낀 경험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여행중에 여러가지 보고 들으므로해서 견문이 &#45338;어지고 깊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여행을 함므로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러게 마음이 성숙해 짐을 뜻하나 우리들의 마음은 본래부터 이 우주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단지 우리들의 마음이 무한히 넓고 명확히 밝은 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들이 그러하지 못한 이유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들의 마음의 본래 모습을 장애하는 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궁금하지 않는가? 이문제만 해결하면 우리들이 처음 논의하였던 극락의 문제도 아주 빠르게 해결되리라고 본다.



예를 들어서 북치는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그 북소리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분별하게 된다. 말하자면 듣는 마음이 그 북소리에 한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북소리를 듣는 그 마음을 觀하면 우리의 내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바로 놀라운 사건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즉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마음이 깨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마음이 우리들의 몸보다 그 반경이 넓어지게 되고 더 나아가 마음이 무한히 넓어 지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은 허공이라고 할 수 있는 데 그보다 더 큰 것이 바로 소리를 듣는 이 마음을 관하게 되면 관하게 된 이 마음이 이 허공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동서남북 등의 八方과 그 위의 上下를 더한 十方의 방향과 처소가 없기때문이다. 때문에 귀라는 구멍을 통하여 작용하는 마음은 그 소리에 얽매어 그 마음이 방향과 처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러한 놀라운 사건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리를 듣는 이 마음을 관하는 이것이 곧 몸의 육근이라는 구멍으로 밖으로 세어나가는 마음이 도리어 逆流(廻光返照)가 되어 일어난 것이다. 逆流가 일어났다고 해서 이 마음이 육체의 반경을 넘어서는 것인가하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역류가 일어날때 우리의 마음이 마치 전등불이 켜지는 것과 같이 우리들의 마음이 깨어날때 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때문에 능엄경에서는 大覺에서 虛空이 생겼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大覺이란 우리들의 마음이 크게 깨어난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허공도 그 大覺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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