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변화시킨 신묘장구대다라니 20만독
오늘도 나는 대비주 진언을 중얼대며 눈을 뜨고 잠이 든다.
내가 부처님 법을 만난 것은 처음은 뭐가 그리 절실해서도 아니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들이 커가면서 이젠 나도 나이 들면서 조급하지 않고 추하지 않게 나이 들고 싶기도 하고, 아이들을 위해 어느 종교에든 귀의하고 싶어졌다. 그럭저럭 별 무리 없이 살던 나는 큰 딸아이를 유학을 보내면서 은근히 걱정이 되는 마음도 있고 해서, 친구를 따라 좋아하는 산도 다닐 겸 관악산 연주암 엘 오르내렸다.
축원카드나 뽑아 올리고는 돌아오는 신앙이었다.아들은 재수를 해서 대학을 갔고, 졸업을 하고 취직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처음으로 큰 사건이 터졌다.
돈이 빚이 되어 내 발등에 불로 떨어졌다.
부처님 앞이었다. 그때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겨우 한달 남짓 덕양선원이라는 도량을 드나들던 때였다. 스님께 상담을 청하니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가시며 법문을 들려 주셨다.
통 마음이 잡히질 않았다. 그러나 스님의 자상한 가르침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게 되었다.
돌아다니다 가부좌를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오히려 세상의 모든 잡념은 다 내 것인 양, 꼬리에 고리를 물고, 평소 위장이 좋지 않던 나는 구토가 나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치질 수술 후유증으로 오는 고통은 더욱 참기 어려웠다.
아픔이 사라질까? 계속 의심하면서 그만두어 버릴까? 다.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왕복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추운겨울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며 방하착을 열심히 했다. 기도시작 2주쯤 되었을 때 나에게서 이상한 행동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몸이 좌우로 흔들리기도 하고, 내 손으로 내 몸을 마구 때리며 울기도 하고, 구석구석 내 몸을 어루 만져주기도 했다. 이런 행동들이 계속되자 나는 너무도 놀라서 스님께 여쭈어 보니 명현 현상이니 더 열심히 정진하라는 말씀뿐이었다. 철야정진을 하며 아들을 떠 올리며 지난 일들을 떠 올려 감정까지 내려놓는 방하착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해 본적도 없던 말이 대체 어떻게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 의아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것은 천수경에 있는 참회 진언이었다. 진심으로 절을 하며 통곡을 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었다. 남편도 아들도 진정 사랑으로 감싸지 못한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들이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내가 되는 것이었다. 돈으로는 아들을 절대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화해를 이루었지만 마음고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병석에 누워 계신 친정어머님도 내 차례였다.
병이 길어지시니 잘해드리려던 마음은 언제인지 사라지고 불평불만을 일삼게 되었다. 그 와중에 백일기도를 마치게 되니 스님께서 ‘여의륜’ 이란 법명을 지어 주신다. 이제 불가에 입문한 불자로 부처님 제자가 된 것이란다. 법명을 받고 보니 팔 한쪽이 불구이신 어머니가 평생 겪으셨을고통이 보이기 시작했고,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어머님이 안타까웠다.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다시 매달리게 되었다. 한 손 밖에 없으셨던 어 머니의 고통을 외면하고 불만으로만 가득 찼던 그런 딸이었다. 깨닫고 보니 어머니는 운명의 순 간을 맞고 계셨다.어찌 어머니로서 한이 없으셨을까! 그 한을 삭이지 못하셔서 임종을 맞이하는 어머니의 얼굴과 눈빛은 무섭게 변해 있으셨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부처님께 간구하고 또 스 님께 의지했다.
4세의 연세로 생을 마치셨다. 임종의 기도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또 깨닫게 되었다. 각이 들 무렵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업장을 녹이며 소원성취를 하는데 힘 이 있어야 된다고 스님께서는 다시 수행에 들라고 말씀 하셨다.
간간히 법문을 들으며 마음에 닥아 오는 것은 정말 다 내 전생에 지은 업보라는 것을 수없이 느 껴 오던 때라 흔쾌히 동참을 했다. 했다. 하지만 식당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몸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버티기 매우 힘이 들어 밤을 새우며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이 모든 것을 누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 했다. 내 업장을 내가 녹여야만 행복의 문이 열린다는 믿음 아래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에 온 마음을 쏟기로 했다.
2004년 9월부터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시작해서 2005년 12월까지 거의 20만독에 가까워 온다. 방하착을 할 때와는 또 다르게 내가 변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처음 시작해서는 소리를 내어 독송을 하다보니 목이 너무 아파오는 것이었 다. 점점 더 아파오니 독송을 그만 둘 수도 없고, 괴로운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나는 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10만독이 멀지 않았던 때 인 것 같다. 바로 그 문제를 놓고 눈을 감고 천천히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신묘장구대다라 니 독송을 시작했다.
는 누군가를 수술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 아니가, 아니, 이럴 수 가!
여래부처님 명호가 나 자신도 모르게 불려지고 있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중에 영가님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은 많이 있어 왔지만, 부처님이 나투신 장면은 처음이라 당황하며 한편으로는 환희로웠다.
나았다고 하신다.몸이 많이 아프신 분들을 위해 자신을 돌보라는 가피를 주신 것 같았다. 않다.기도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독송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20만독 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가까워지고 있다.
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라’ 고 채근하셨다.식당경영을 하는 나로서는 20만독이라는 숫자를 채우 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또 잠을 줄이며 독송을 한다.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가 참으로 대단한 진언임을 새삼 알게 되었다.
과정을 지켜보게도 되었고, 돌아가실 때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해 드렸는데도 어머님의 업장도 두터우신지라, 친정어머님은 돌아가신 뒤에도 극락왕생을 못하시고 방황하며 아버님 곁으로 가 지 못하신 것을 기도 중에 알게 되었다.
머님을 위해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하였다, 오빠의 영가도 나타나 힘든 시간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분들을 오직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하며 천도 시켜드렸다. 누리게 된 일도 있다.
기도가 내게 삿된 생각을 사라지게 하는 힘이 되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을 깨닫게 되었다. 보물창고로 알았던 탐, 진, 치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을, 비어 냄으로 더 찬란한 보물로 가득 찬다는 이치를 알게 된 것이다.
“불심의 자리에서 확고하게 믿고 최선을 다해서 무심으로 수행정진 하다 보면 현증가피, 몽중가 피, 명훈가피 중 어떤 형태로도 우리에게 부처님께서는 가피를 주십니다.” 라는 스님의 말씀을 믿고, 부처님의 말씀대로 이제는 흔들리는 마음 없이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이다.
두 번이나 했으며, 백일 정진을 거듭하며 매일 삼백독 씩을 해 나가고 있다. 그 자리는 새로운 내 안의 대비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10만독의 자리에 도달할 것이지만, 그 날이 기다려진다.
로 마음은 태평양 바다가 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부처님의 미소를....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진심으로 자비심을 보낸다. 원만히 성취하시기를 두 손 합장 기원 드립니다./[미주현대불교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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